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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울산항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행기

by 가족풍경수집가 2018. 5. 7.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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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수도 경주에 인접한 울산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주요 무대로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울산항을 주요 무대로 펼쳐진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바로 처용 설화입니다. 현재 온산공단을 마주보는 회황강 하류에 있는 '처용암'이 처용이 처음으로 나타난 장소잊요. 처용암은 몰라도 '처용'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은 들어본 이름입니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몇 안되는 신라시대 향가 중에 가장 잘 알려진 향가 역시 '처용가'일 겁니다. 학문적으로도 인기가 많아 처용가나 처용무에 관한 연구논문만도 300여편에 이를 정도로 국문학 연구에서 단일 대상으로는 가장 많은 편입니다. 




당시 서역인을 본 뜻 것으로 추정하는 괘릉의 무인석상


상황이 이러다보니 '처용'의 정체는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다양하게 추측하던 와중에 학계에서도 꽤 설득력있게 받아들인 가설이 있으니... 정수일 교수의 '이슬람상인'설입니다. 문명교류사 전공자답게 중세 아랍문헌을 근거로 이슬람과의 교류는 물론이고 이슬람 인의 집단 정착도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 울산항의 중심지는 처용암의 배경이 된 '개운포'가 있는 '회황강'이 아니라 울산 도심을 관통하는 '태화강'입니다. 지도를 보더라도 회황강 보다는 태화강이 울산 중심지에서 배로 바로 이어지고 경주와도 역시 가까워서 중심항이 들어 서기에 더 좋거든요.

또한 정유재란 기록을 보면 울산왜성(현재 '학성공원')에서 왜놈들이 도망칠 때 성을 빠져나와 배를 타고 갔다는 기록이 있거든요 당시 학성공원 앞이 적어도 바다와 강의 경계지역으로 큰 배도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인 거지요. 조선 시대가 이러하였는데 신라 시대 역시 이 쪽에 큰 항이 있었으리라는 거는 짐작이 아니라 자명한 사실입니다.




 


"신라 제24대 진흥황이 즉위한 14년 계유년(553) 정월에 용궁의 남쪽에 대궐을 지으러 하였는데, 그 땅에 황룡이 나타났다. 이에 고쳐서 절로 삼고 황룡사라 하였다. 기축년에(569)에 이르러 비로서 완성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 한척이 떠와서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의 울주 곡포이다)에 닿았고, 그 안에는 공문이 있었다. 공문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서축(西竺) 아육왕이 황철 5만7천근과 황금 3만 푼(별전에는 40만 7천근, 금이 1000냥이라고 하였으나 아마도 잘못된 것 같다. 또는 3만 7000근이라고도 한다)을 가지고 장차 석가의 존상(尊像) 세 개를 부어 만들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내며 인연이 있는 땅에 도착해 여섯 길이의 존용을 이루어주소서라 축원하고 아울러 견본으로 불 상 한 개와 보살상 두 개를 실었다.'

현의 관리가 장계를 올려 보고 하니, 사자에게 명을 내려 그 현의 성 동쪽의 높고 깨끗한 곳에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세 존상을 맞이하여 모시도록 하였다"

『삼국유사』권3「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편에서 부분 인용


삼국유사에서 울산에 관련된 아주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우선은 울산의 가장 오래된 사찰 '동축사'의 기원이 여기에 분명히 나옵니다. 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서축 아육왕(아소카 Ashoka Maurya , 인도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룬 왕)이 보낸 배에 별전 기록을 보면 40만 7천근과 금 1000냥이 실렸다는 점입니다. 이를 선적한 배가 사포에 닿았다는 거지요. 이러면 항구 접안 시설이 그냥 어선 몇 척 들어오는 규모가 아니라는 겁니다.



▲경상도읍지 울산지도 1832(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 동천과 태화강이 비슷한 크기다


하곡현(울산의 옛 이름) 사포는 태화강 중류와 하류 사이의 어느 지점입니다. 조선 시대에 편찬한 울산 지도를 보면 동천이 태화강에 비해 결코 작은 하천이 아니죠. 동천이 경주와 연결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동천 역시 당시에는 꽤나 중요한 하천이었겠죠. 이런 점을 생각하자면 태화강과 동천이 만나는 곳에 자연스럽게 항이 들어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울산항은 신라시대 때부터 이미 국제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무역항이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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